어디서든 일 할 수 있다면

종종 메밀을 먹거나 교보문고에 가려고 광화문에 가곤 했다. 광화문의 빌딩 숲과 너 나 할 것 없이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며 회사를 다닌다면 광화문에서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과는 달리 2020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었고 개발자로 취업을 하게 되면서 자유로운 IT 회사에 다니고 있다. 마침 회사에서는 자율근무지 선택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광화문을 걸어 다닐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전 세계 어디서든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율근무지 선택제는 말 그대로 어디서든 근무할 수 있다는 제도다. 유럽, 일본, 제주도, 동네 카페 등등 집도 자율근무지에 포함된다. 노트북만 있고 와이파이 속도가 일정 속도를 만족하면 해변가라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가장 큰 장점은 출근시간도 자율 선택이라는 점이다. 재택을 할 때면 출근시간은 침대에 일어나서 책상에 앉을 때까지의 시간이다. 덕분에 저녁이 있는 삶, 아침이 있는 삶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사무실 출근이 필수였다면 아침 운동은 상상할 수 없지만 자율근무지 선택제 덕분에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었다. 그동안 지옥철을 타고 다녔던 시간들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다.

그러나 자율근무지 선택제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바로 자율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흔히 자율과 자유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자율은 자유와 다르다. 자율은 자기가 세운 규율이 있고 자유는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 회사에도 규율은 존재한다. 우선 해외에 가려면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선정된 나라만 갈 수 있고 최대 한 달까지만 근무할 수 있다. 항공편을 예약하고 승인을 받지 못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같은 팀원끼리 함께 근무할 수 없다.

가장 큰 제약사항은 시차다. 우리 회사는 유연근무제(탄력근무제)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또한 규칙이 있다. 코워킹 타임이라는 규칙이 있는데, 10시 30분 부터 16시까지는 모든 직원들이 출근해있어야 한다는 규칙이다. 유럽이나 미국같이 시차가 많이 나는 나라에서 근무하기는 힘들다. 만약 유럽을 간다면 코웍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새벽부터 아침까지 일해야 한다. (물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시차 적응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유럽을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하시는 분이 대다수다.

해외보다는 국내가 접근성이 좋아서 우선 국내 워케이션에 도전했다. 팀원 대부분과 함께 제주도 워케이션을 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차를 타고 애월로 이동했다. 애월 바닷가 앞,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치니 느낌이 새로웠다. 평소와는 다른 환경이라 집중이 안 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집중이 깨지면 잠깐 바다를 보러 나간다. 반짝이는 모래밭을 걸으면서 햇살을 충분히 받고 다시 돌아온다. 저녁이 되면 팀원들과 맛집을 찾으러 가고 숙소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국내는 교통 비용이 비교적 싸서 일과시간에 일을 해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해외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드는 비용이 국내보다는 비싸서 일과시간에 일을 하면 시간이 아깝다. 얼른 밖으로 나가서 여행을 즐기고 싶지만 근무시간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근무 규칙 때문에 제약이 있어서 평소와는 다른 여행을 하게된다. 첫 번째로 밖에서 여행하는 시간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다른 여행보다 좋은 숙소를 찾게 된다. 보통 싸고 좋은 숙소의 특징은 외곽에 있다. 두 번째로 외곽에 숙소가 있으면 도심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주변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로컬 맛집을 찾게 된다.

첫 해외 워케이션은 대만이었다. 숙소 주변에는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밖에 없었다. 대만은 한국인들이 꽤 자주 가는 여행지인데도 한국 사람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이제껏 해외여행을 갔을 때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의아할 때가 많았는데, 대만 워케이션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면 구글맵을 킨다. 근처의 식당을 고르고 찾아간다. 사실 찾아가는 곳이 엄청난 맛집도 아니라서 길을 걷다가 맛있어 보이는 곳이 있다면 계획을 틀어서 그곳으로 갔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한국어 메뉴도 없는 가게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 나오는 백종원 선생님이 된 것만 같았다.

워케이션을 가면 일해야 할 장소를 선택하는 게 고민이다. 대만에서는 일 할 장소를 찾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도심이 아니라서 카페가 많지 않았다. 코워킹 스페이스를 기대할 만한 곳도 안된다. 온라인 회의를 해야 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조용한 장소도 있으면 좋지만 그런 공간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거의 호텔에서 근무했다. 비좁은 책상 하나밖에 없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집중이 잘 됐다. 새로운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시간의 압박 때문이다. 해외에 나와서 야근을 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비참하다. 그래서 무조건 근무시간 안에 일을 끝내려고 노력했다. 아이러니하게 몰입이 잘 되니까 근무시간이 끝나도 작업을 계속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총 5일의 근무일 중 2일 정도만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워케이션에서는 좀 더 넓은 책상과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 숙소를 선택해야 함을 몸소 느꼈다.

첫 워케이션에서 교훈을 얻고 도쿄로 두 번째 해외 워케이션을 다녀왔다. 이번에도 물론 외곽에서 숙소를 잡았다. 대만 때 보다 더 넓은 책상이 있는 집에서 묵었다. 점심에는 주민이 된 것 마냥 동네를 배회했다. 근처 초밥집에 들러 점심 세트를 먹으면서 한국에서 자주 가던 초밥집의 점심 세트와 비교해 보기도 하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기도 했다. 일본의 수도를 갔는데도 관광객을 자주 못 보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주변 수족관에 갔을 때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보았는데 평소답지 않게 반갑기도 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해외여행과는 상반되는 감정을 줬다. 전에 여행했던 베트남 다낭을 떠올려보면 어딜 가나 한국인이 있었고 심지어 현지인들도 한국어를 잘했다. 식당에서는 한국어로 쓰인 메뉴판이 따로 있었다. 지금 해외를 온 건지 한국 어느 지방을 온 건지 의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워케이션에서는 관광지보다는 실제 주민들이 가는 곳들을 찾았다. 문득 예전에 유행했던 브랜드 캠페인이 생각났다. “여행은 살아 보는거야“ 에어비앤비의 브랜드 캠페인이다.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히라고 하는데,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의 모습과의 비교를 통해서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워케이션이 생각보다 제약이 많아서 실망했었지만 의외로 나에게 기존과는 다른 여행법을 선물해 줬다. 이제는 워케이션이 아니더라도 장기 여행을 간다면 그 지역의 생경함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영원히 지키고 싶었던 제도지만 모든 것은 끝이 나듯이, 근무지 자율 선택제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부터 다시 사무실에 출근해야 한다. 이제 익숙해져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회사원으로 밥벌이한다는 것은 본인의 시간과 공간 선택의 자유를 회사에 주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 회사는 한동안 구성원들에게 공간 선택의 자유를 줬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공간 선택의 자유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학생일 때는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회사원일 때도 정해진 시간에 회사에서 일을 했다. 하나의 제약이 풀리는 것만으로도 삶에서 공간 선택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시간의 제약도 풀리는 삶도 상상해 본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파이어족이 되나 보다.